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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연예

[영화]한국 영화의 역사 알고보면 더 재밌다. 1탄

2020.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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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의 역사를 알고보면 그시대의 특징이 보인다.



안녕하세요!
김묘니 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한국 영화의 역사를 알아보려고 하는데요. 역사를 알아보면 한국 영화가 더 새롭게 느껴질 수도 있고 우리 나라 영화가 얼마나 발전했는지도 알 수 있어서 좋은 기회가 될거 같아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볼때 영화를 만든 나라의 배경지식이나 특징을 알 수 있어서 더욱 더 좋은거 같은데요.

대한민국의 영화는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을까요?
(글이 길어져 1,2편으로 나누었으니 참고 부탁 드려요!)

영화1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1. 개화기 시절

한국의 영화는 개화기 시절 서구문물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가운데에 영화라는 문화도 한국에 들어오게 됩니다.

최초로 상영한 시기는 1903년 이전으로 보고 있으며 이때 당시에는 움직이는 사진정도로 인식되어 '활동사진'으로 불리게 됩니다.

역사상 최초의 한국 영화는 1919년작 '의리의 구두'라고는 하나 이 영화는 100% 순수 영화라곤 할 수 없고 연극을 촬영한 혼합된 형식이였기때문에 1923년작인 '월하의맹세'를 최초의 한국 영화로 통용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영화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제작된 영화라는 점입니다. 사실상 일본의 강압에 의해 제작된 영화라 순수 우리나라의 힘으로 만든 영화라고는 볼 수 없는 점이 있죠.

추후 본격적으로 순수 한국의 힘으로 만든영화는 나운규의 1926년작 '아리랑'이라고 하는데요, 나운규는 이때당시 24살이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흥행, 영화 주제,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까지 두루 갖춘 '아리랑'을 발표하면서 한국영화의 아버지라 불리기 손색이 없을정도로 위엄을 수립하게 됩니다.

2. 1950년대 한국영화

대한민국이 정부가 수립된 후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파탄나고 남북이 갈라지면서 영화계는 침체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을 지나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한국영화는 그 짧은 사이에 많은 기술이 발전하여 제작 편수가 증가하게 됩니다. 일제감정기를 통틀어 150여 편에 불과했던 한국영화는 1950년대 후반 1년사이에 100편 가까이 찍을 정도로 그만큼 발전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자유부인'은 세련된 연출과 시대를 앞선 감각으로 1950년대 한국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됩니다.

3. 1960년대 한국영화 - 황금기

4.19혁명과 5.16 군사정변이라는 큰 사건을 겪으면서 출발한 1960년대는 한국 영화계의 황금기라 불릴 정도로 급속도로 발전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때부터 제가 좋아하는 멜로라는 장르가 한국영화에도 나타나기 시작하고, '오발탄'처럼 당대의 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도 있었지만, 이때당시는 그닥 자유롭지 못한 시대이기 때문에 나라의 압박을 견디며 힘겹게 상영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서민들에게도 이때부터 영화라는것이 알려지면서 1969년에 약 1억 7000만명의 관객수를 기록함으로써 절정에 달했고 이 기록을 깨기까지는 무척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2012년에 이 기록을 깼다고 하네요! 이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영화를 좋아했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때부터 안성기가 아역스타로 데뷔하였으며, 임권택, 정진우 감독 (지금은 한국 영화 감독의 거장)이 이 시기에 두각을 드러내며 감독 데뷔를 합니다.


대중적으로는 눈물을 자극하는 신파류 영화가 인기를 끌었으며, 대표 주연 배우 '문희'주연인 미워도 다시 한번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4. 1980년대 한국영화 - 침체기

황금기를 달리던 한국영화는 침체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연도별 관객수가 70년대보다 80년대 관객수가 더 없을 정도로 정부의 시장 왜곡으로 영화 시장은 더욱 암흑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것이죠..

전두환 정부는 정치나 사회, 사상면에서 검열을 무척 심하게 했고 그게 영화에서도 적용 되어 그런 주제로 한 영화는 무참히 상영을 실패 하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정부에서 오히려 에로물을 상영하라고 강요할 정도였으니 더더욱 침체되는 한국 영화 시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기다가 홍콩 영화와 헐리우드 영화등 영화 수입이 증가에 따라 대중은 더더욱 국산 영화를 외면했죠.


1987년 드디어 민주화에 힘입어 금기시 되었던 사회문제들을 다룬 영화들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주로 한국전쟁기의 좌파 우파의 대립과 군부 독재 시절 학생운동, 급속한 개발로 인한 빈부격차등의 주제로 영화를 제작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영화는 미국, 홍콩등 국제 영화에 밀려 항상 우리나라 영화의 점유율은 40% 미만일정도로 침체를 맞게 됩니다.

4. 1990대 한국영화

90년에데 IMF가 터진것처럼 한국영화의 위기는 계속됩니다..

이때도 수입영화들이 대거 흥행을 기록하며 한국영화의 점유율은 20% 아래로 떨어지는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나마 1991년 '장군의 아들'의 영향으로 점유율 20%를 유지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도 한국영화는 암울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1993년 미국의 '쥬라기 공원'의 히트에도 불구하고 '서편제'가 개봉만으로 100만명이 넘는 초유의 기록을 수립하는 일이 벌어지며 한국영화의 관심이 다시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케이블TV가 본격적으로 개국하며 대기업들이 영화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때도 이때입니다. 대자본이 유입되면서 한국영화의 스케일 또한 커지기 시작하는데요, 영화와 제작 배급에 있어서 과거의 주먹구구식 관행에 탈피해 영화 기획부터 탄탄한 단계를 거쳐 영화 제작을 시작하게 됩니다.


1990년대 후반 영화를 살펴보자면 판타지, SF영화가 한국영화에서 제작이 되기도 하고 한국형 블록버스터라고 불리는 '퇴마록'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때부터 송강호, 한석규처럼 톱스타들이 데뷔를 하기도 하고 '여고괴담'처럼 공포영화도 출현하여 한국영화가 질적으로 상승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저도 여고괴담 어릴때 봤는데 그당시에는 그냥 무섭다고만 느껴졌지만 다시보면 그때당시 기술력으로 꽤 잘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IMF가 터졌을때 영화 시장에도 엄청난 타격이 있을꺼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했지만 CJ와 롯데 등 남아있는 대기업들이 한국영화 성장가능성에 올인했고, 이로인해 강변 테크노마트에 멀티플렉스형 영화관이 확장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한석규 주연인 '쉬리'가 대 흥행을 터뜨리며 '타이타닉'을 꺾는 기록을 세우기도 합니다.


후,, 오늘은 여기까지 알아보겠습니다!

손으로 타자를 계속 치려니 힘드네요!


다음편인 2탄에는 2000년대 초반과 현재까지의 한국영화의 흐름을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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